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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록체인과 디지털 민주주의

본 칼럼은 중앙일보 편집국의 편집을 거쳐 https://news.joins.com/article/23680355 으로 게재되었습니다.

아래 원고는 편집국에 제출한 원문입니다.

블록체인과 디지털 민주주의


축구를 하는데 심판이 없다면, 수능시험을 보는데 감독관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심지어 선거를 치르는데 만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없다면 투표가 어떻게 될까요? 큰 난리가 날 것입니다. 한 사람이 여러 후보에게 투표할 수 있는 ‘이중투표의 위험성’과 각종 부정행위의 가능성 때문입니다. 비슷한 예로 금융 거래를 처리하는데 중앙금융결제기관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역시 큰 난리가 날 것입니다. ‘이중지불의 위험성’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물건을 구매한 후 ATM기기로 대금을 보내면서 동시에 스마트폰으로 자신에게도 같은 금액을 또 보내려 한다면, 은행은 중앙 서버에 먼저 도착한 거래부터 순차적으로 처리하기 때문에 이런 시도의 성공이 불가능하지만, 블록체인은 서버들이 전 세계에 퍼져 있어 거래가 전파되는 시간차가 존재하고 심지어 전원이 꺼져 있는 서버들도 있기 때문에 이를 악용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비트코인은 중앙 금융결제기관이 없는데도 지난 10년 동안 이중지불의 사고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일찍이 컴퓨터공학에서는 중앙통제기관이 없으면 시스템이 사고 없이 스스로 안전하게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마치 성을 함락시키는 전쟁 상황에서 공격하는 전투부대와 성의 수비 전력이 비슷하여 전투부대들이 동시에 한꺼번에 공격해야 한다면, 일사불란하게 사령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는 상황에 빗대어 비잔틴 장군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비트코인은 이 문제를 금융분야에서 해결한 첫 번째 사례입니다. 그래서 비트코인 논문의 제목을 ‘블록체인 기반의 암호화폐’가 아니라, 대중들이 스스로 운영해간다(Peer to Peer)는 뜻에서 ‘Peer to Peer Electric Cash System’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이처럼 중앙검증기관이 없어도 참여자들이 스스로 검증하며 운영하는 체계를 ‘탈중앙화’ 시스템이라고 합니다.


탈중앙화를 구현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이 ‘합의 알고리즘’입니다. 중앙검증기관이 해야 할 검증의 역할을 대중들이 스스로 해낼 수 있도록 참여와 검증의 규칙을 세우는 것입니다. 비트코인의 사례에서는 전 세계에서 비트코인으로 송금했다는 주장들을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비트코인 서버 운영자들에게 보내 옳은 주장을 기록하고 오류를 검증해 낼 수 있도록 10분 단위로 출제되는 수학 문제와 비트코인 상금을 결합한 검증 보상 제도의 규칙을 세웠습니다.


블록체인 연구자들은 비트코인의 탈중앙화 성공사례를 응용하여 디지털 투표 분야에도 적용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블록체인에 돈을 보내는 송금의 의사 표시를 넘어 특정 후보를 지지한다는 ‘정치적 의사표시’를 보낼 수 있다면, 블록체인과 디지털 투표를 결합해 오프라인 선거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더 꽃피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가 익숙한 오프라인 중심의 투표와 여론조사 방식에는 크게 5가지의 한계가 있습니다. 첫째, 고비용 구조입니다. 현재 4년마다 진행되는 국회의원 선거는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을까요? 2주 간의 선거운동 기간이 시작되면 짧은 시간 동안 각종 포스터와 트럭 연설을 통해 주민들로부터 권한을 위임받기 위해 모든 후보들이 경쟁하지만 정작 선거가 끝나면 어떨까요? 학생들은 매 학기 시험을 보고 직장인들도 매년 평가를 받는데, 국회의원 선거는 4년 주기로 진행됩니다. 선거 후에도 정기적으로 후속 투표를 진행해 민심을 전달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오프라인 투표는 운영 비용이 많이 들고, 각자 생업에 종사하는 주민들 또한 투표하려면 기회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자료에 의하면 2018년 6월 지방선거에 들어간 예산이 1조 7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디지털 투표 기술이 발달하면 국회의원 선거 이후에도 자주 투표하고 평가하여 수시로 지역 민심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습니다.


둘째, 현재 오프라인 투표 방식에서는 투표권을 위임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원전문제, 환경문제, 교육정책, 의료 빅데이터 등 전문 지식이 필요한 과제들을 단순 투표나 공론화의 절차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요? 디지털 투표를 통하면 내가 지지하는 해당 분야 전문가들에게 투표권을 위임할 수 있습니다.


셋째, 다수결의 한계입니다. 수학자 콩도르세는 단순 다수결을 통한 투표가 오히려 구성원의 선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는 투표의 역설을 지적했습니다. 대통령 후보가 3명 이상인 선거에서 단일화가 진행되지 않고 경쟁이 난립하여 33%대의 낮은 득표율로 당선된다면 유권자의 3분의 2가 지지하지 않는 당선이 만들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수결 제도에서는 소수의 의견이 다수의 의견에 희생될 수도 있습니다. 희귀한 불치병에 걸린 안타까운 환자를 구하기 위해 신약 비용을 지원하는 것을 다수결 투표로 진행한다면 대중은 불치병의 고통을 환자와 가족만큼 느끼는데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미국 시카고대학교의 법경제학자 에릭 포스너 교수는 래디컬 마켓이라는 저서를 통해 1인 1표제의 한계를 지적하며 개인이 투표할 때 마음의 강도를 반영할 수 있는 제곱 투표의 아이디어를 제안합니다. 예를 들어 시민들에게 1년에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100장의 쿠폰을 지급하고 쿠폰 4장을 소진해서 2표의 강도를 표시할 수 있고 쿠폰 9장을 소진해서 3표의 강도를 표시할 수 있다면, 불치병 환자와 가족들은 다른 투표의 참여 기회를 잃더라도 신약 비용 지원 투표에 더 많은 쿠폰을 사용해서 투표의 강도를 표현할 것입니다. 디지털 투표 환경에서는 쿠폰 소진과 제곱 투표를 보다 쉽게 구현할 수 있습니다.


넷째, 무효표가 많이 나옵니다. 국가 단위로 4차 산업혁명을 외치는 시대에 아직도 우리는 투표할 때 잉크 번짐을 주의해야 하고, 그에 대한 해법으로 투표용지를 세로로 접는 것을 권장하는데 머물러 있습니다.


다섯째, 전화 중심의 여론 조사 방식에 한계가 있습니다. 전화보다 문자를 선호하고, 접촉을 싫어하는 트렌드를 빗대어 언택트(untact)라는 단어까지 나오고 있는데 전화 중심의 여론 조사는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을까요? 디지털 투표 기술이 발달하면 스마트폰을 통해 쉽고 빠르게 여론을 조사하는 디지털 여론 조사 기법도 함께 발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디지털 투표의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비밀투표의 구현과 보안의 위험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큰 고민을 피할 수 없습니다. 디지털 투표를 고민하는 연구자들이 블록체인 기술을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비트코인은 데이터를 저장하는 중앙 서버 없이 오히려 모두가 원본을 나누어 가지면서 새로운 신뢰 시스템을 구현한 첫 번째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투표의 진행과 위조 검증 역할을 중앙기관에만 의존하기보다 오히려 시민들, 주요 정부 기관, 비정부기구, 정당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다면 새로운 방식의 신뢰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스페인의 엔보트(nVotes)라는 스타트업은 이러한 생각을 실제로 구현해 낸 기업입니다. 엔보트는 블록체인 기반 디지털 투표 시스템을 개발하여 상용화하였고, 스페인의 포데모스 정당과 각종 학교, 협회, 재단 등에 제공하고 있습니다. 포데모스 정당은 이를 바탕으로 시민들과 당원들이 열정적으로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아고라 투표(Agora Voting)시스템을 운영하여 돌풍을 일으켰고, 창당 초기임에도 불구하고 2014년 유럽 의회선거에서 스페인에 할당되는 총 54석 중 5석을 획득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중국은 지난 해 11월 24일 제 18차 집단학습에서 시진핑 주석이 직접 블록체인 육성을 강조하며 국가 단위로 블록체인 사업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중국은 암호법을 시행하고 인민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화폐까지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중국이 탈중앙화 가치의 구현을 위해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의 정치환경에서 디지털은 중앙 중심의 통제 가능한 시스템을 구현하기 위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이 블록체인에서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의 실험’입니다.



한국은 이코노미스트가 선정한 아시아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유엔의 전자정부 평가에서 여러 차례 1위를 달성한 국가입니다. 한국은 디지털 민주주의를 통해 작고 소소한 투표를 생활화하고, 새롭고 창의적인 투표 규칙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한국이 민주주의의 미래 연구를 주도하고 디지털 정보 격차를 줄이고 디지털 교육을 강화하면, 우리가 스페인의 사례를 인용하기 보다 전 세계가 대한민국의 디지털 민주주의 문화를 인용하게 할 수 있습니다.


중앙성거관리위원회는 2013년부터 K-Voting이라는 온라인 투표 플랫폼을 개발하여 시민들이 아파트 대표 선거, 학생회장 선거와 같은 생활 투표에 이용할 수 있도록 제공해 왔습니다. K-Voting의 투표 개설수는 2013년 16건에서 2017년 1,360건으로 빠르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앙 서버의 위조와 해킹 위험에 대한 구조적 한계 때문에 총선이나 지방 선거 등으로 확대하기 어려웠습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함께 2018년부터 블록체인 투표 시스템을 연구해 왔으며, 최근에는 조달청 나라장터를 통해 ‘블록체인 기반 온라인투표 시스템의 정보화전략계획 수립 사업’을 발주했습니다. 한국의 디지털 민주주의 발전의 중요한 로드맵이 될 것입니다.


총선이 다가옵니다. 뻔한 포스터와 뻔한 트럭 율동의 2주짜리 선거 운동이 다가옵니다. 이 선거를 디지털화하면 내 손 안의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국민이 보다 똑똑하게 주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김문수 aSSIST 경영대학원 크립토MBA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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